인간은 언제부터, 어떻게 매운맛을 즐기게 됐을까?
지난 글에서 캡사이신이 원래 고추가 포유류를 쫓아내기 위해 만든 방어 물질이라는 걸 살펴봤어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정작 그 방어 물질을 가장 열심히 찾아다니는 포유류가 하나 있죠. 바로 인간이에요. 통증을 유발하는 물질을 오히려 즐기게 된 인간의 역사, 오늘은 그 여정을 따라가 볼게요.
고추 이전에도 매운맛은 있었어요
사실 인류가 매운맛을 처음 경험한 건 고추가 아니었어요. 고추가 전 세계로 퍼지기 훨씬 이전부터, 각 대륙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매운 향신료를 이미 사용하고 있었어요.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후추가 오래전부터 중요한 향신료였고, 유럽에서는 겨자와 고추냉이류가, 동아시아에서는 생강과 산초가 매운맛을 담당했어요. 고대 로마에서는 후추가 금과 맞먹을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을 만큼, 매운맛에 대한 인류의 관심은 문명 초기부터 뿌리 깊었어요.
즉 고추가 등장하기 전부터 인류는 이미 '매운맛을 찾아다니는 존재'였던 거예요. 고추는 그 오랜 관심의 역사에 새로 등장한, 그러나 가장 강력한 매운맛 재료였을 뿐이에요.
고추의 고향, 아메리카 대륙의 매운맛 역사
고추(캡시쿰속 식물)는 원래 아메리카 대륙, 그중에서도 오늘날의 멕시코와 중남미 지역이 원산지예요.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멕시코 지역에서는 최소 6천 년 전부터 고추를 재배한 흔적이 발견돼요. 아즈텍 문명과 마야 문명에서는 고추가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의례와 약재로도 쓰였고, 화폐처럼 거래되기도 했어요.
고추는 아메리카 대륙 밖에서는 15세기 말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식물이었어요. 즉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한국의 김치, 태국의 똠얌꿍, 인도의 매운 카레 속 고추는 모두 불과 500여 년 전까지는 그 지역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재료였다는 뜻이에요.
콜럼버스의 교환, 고추가 전 세계로 퍼진 결정적 사건
고추가 세계로 퍼져나간 결정적 계기는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이었어요. 이후 아메리카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사이에 동식물과 작물이 대규모로 교환되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를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이라고 불러요. 고추도 이 교환의 대표적인 품목 중 하나였어요.
흥미로운 점은 고추가 유럽을 거쳐 천천히 퍼진 게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들의 무역로를 통해 매우 빠른 속도로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시아까지 전파됐다는 거예요.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고추는 아메리카를 벗어나 거의 전 세계 대륙에 뿌리를 내렸어요. 이는 식물의 대륙 간 전파 속도로는 이례적으로 빠른 사례로 꼽혀요.
아시아로 건너간 고추, 어떻게 각국의 주식이 됐을까?
고추가 아시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각 지역은 이미 후추나 산초 같은 매운 향신료 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추를 비교적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인도에서는 기존의 향신료 문화에 고추가 자연스럽게 흡수되면서 오늘날 카레 문화의 핵심 재료가 됐고, 태국과 동남아시아에서는 향신료와 허브를 함께 쓰는 조리법에 고추가 더해지면서 복합적인 매운맛 요리들이 발달했어요.
한국의 경우 고추가 전래된 시기는 대체로 임진왜란 전후인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로 추정돼요. 이후 고추는 김치, 고추장 등 발효 음식과 결합하면서 한국 음식 문화의 핵심 재료로 자리 잡았어요. 흥미롭게도 고추가 들어오기 전 한국의 매운맛은 주로 산초와 생강이 담당했는데, 고추가 그 자리를 완전히 대체하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한국의 매운맛 정체성이 만들어졌어요.
통증인데도 왜 인간은 매운맛을 선택했을까?
여러 학자들은 인류가 매운 향신료를 즐기게 된 이유를 다양하게 설명해요. 그중 대표적인 가설이 '항균 가설'이에요. 냉장 시설이 없던 시대에 고온다습한 지역일수록 음식이 쉽게 상했는데, 고추와 향신료의 항균·항균성분이 부패를 늦추고 식중독 위험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줬다는 거예요. 실제로 열대 지방일수록 향신료를 많이 쓰는 음식 문화가 발달한 경향이 있다는 연구도 있어요.
여기에 앞선 글에서 다룬 신경생리학적 이유도 함께 작용해요. 매운맛이 주는 통증이 엔도르핀과 도파민 분비로 이어지면서 쾌감을 만들어내는 경험이 반복되고, 이것이 세대를 거쳐 문화적 취향으로 굳어졌다는 설명이에요. 즉 생존을 위한 실용적 이유와, 뇌가 만들어내는 쾌감이라는 심리적 이유가 함께 맞물리면서 인류는 위험한 자극을 오히려 즐기는 독특한 식문화를 발전시켜 온 거예요.
오늘의 정리
오늘은 고추가 등장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매운 향신료의 역사부터, 아메리카 대륙에서 시작된 고추가 콜럼버스의 교환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과정, 그리고 인류가 통증인데도 매운맛을 즐기게 된 이유까지 살펴봤어요. 불과 500여 년 만에 전 세계인의 식탁을 점령한 고추의 확산 속도는 정말 놀라운데요. 다음 글에서는 이렇게 다양해진 매운맛을 사람들이 어떻게 숫자로 비교하고 측정하게 됐는지, 스코빌 지수의 탄생 이야기를 다뤄볼게요.
댓글
댓글 쓰기